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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욱(4회 동문) 著 술통(수필집)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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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강요찬(0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572회 작성일 06-11-01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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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이름 표기원칙 : 이름의 끝 글자를 '팔'로 바꾼다. 이름이 외자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80년대의 들머리에 만난 내 술벗들은 서로를 이런 방식으로 부르곤 했다. 나도 도리 없이 '장승팔'로 불렸다. 아무튼 이 글에서 제 이름 석 자를 만나는 것이 반갑지 않을 녀석도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내 친구들 이름에는 거의 모두 이런 법칙을 적용했다. 다만 몇몇 예외는 있다. 참고로 내 친구들 중에 이름이 팔 자로 끝나는 녀석은 한 명도 없다. 

제 1부 <사랑 3종 세트>

◇장승욱 어록
    사랑 : 나랑 너랑 너랑 나랑

  <사랑은 움직이지 않는 것>

  1. 어느 시인의 시집 제목이었지 아마. 『나 같은 것도 사랑을 한다』. 그래, 나 같은 것도 사랑을 한다. 아니 사랑한 적이 있었다. 딱 한번, 생각만 해도 눈자위가 젖어들 것 같은, 그런 사랑을 한 적이 있었다. 고3 때였다.
  남들은 뺑뺑이로 들어갔지만 시험을 치러, 그것도 최상위의 성적으로 입학한 고등학교. 여러 가지 말할 수 없는, 또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나는 고교생이 되자마자 글자 그대로 학업에 뜻을 잃었다. 그리하여 학급 석차가 62명 가운데 61등으로 거의 요지부동이었던 2학년 이후로 나는 학교 공부를 완전히 작파하고 낮에는 잠으로 밤에는 술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은 도서관에서 영어 단어, 수학 공식과 씨름하고 있을 때, 나는 초저녁부터 술을 마시고 지금은 없어진 광화문 숭문서림 앞 버스 정거장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거나, 그도 시들해지면 종로서적에 가서 다 아는 얘기만 써 있는 소설책들을 뒤적이다가 막차를 타고 하숙집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2. 5월이었던가. 기억의 갈피에 라일락 냄새가 배어 있다. 포도송이 같은 등꽃도 피어 있었던가. 점심시간이면 교정의 잔디밭에 누워 음악반 아이들이 틀어 대는 비지스의 「트래지디」를 들으며 앞으로의 내 삶은 당연히 '비극'이 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그런 나날의 어느 하루, 학교에서는 축제가 열렸다. 등나무 그늘에서는 시화전이 열리고 내 엉터리 시도 하나 거기에 끼여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찾아왔다. 시내에 있는 어느 여학교의 문예부장인 그녀는 문예부원들끼리의 교류를 주선하기 위해 자기 사촌이 다니고 있는 우리 학교에 왔던 것인데, 우리 학교에는 문예부라는 것이 아예 없었고, 그 사촌은 하필 우리 반 친구였으며, 그래서 그 녀석은 그녀를 그때 교내에서 연애편지 대필로 어설픈 문명(文名)을 날리고 있었던 내게로 데리고 온 것이다.
  별로 말을 많이 했던 것 같지는 않다. 물론 할 말도 없었을 테고. 할 말이 있었다 해도 어떻게 말할 수 있었겠는가.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열아홉 소년이었고, 더구나 그녀를 보자마자 '사로잡힌 영혼'이 되고 말았으니. 그녀의 반듯한 이마와 흰 교복 블라우스 반소매에서 빠져 나온 두 팔이 마치 금박을 입힌 것처럼 눈부시게 빛나던 것을 기억한다. 그녀가 돌아간 다음 나는 우리 반의 그녀 사촌으로부터 그녀가 토요일마다 개봉동의 교회에 나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3. 학교 앞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던 나는 토요일마다 수원에 있는 본가에 가게 돼 있었다. 그 다음 토요일, 수업을 마친 나는 개봉동에 있는 개봉극장을 찾아갔다. 개봉극장은 '개봉'이라는 이름답지 않게 우리 학교 아이들이 「성웅 이순신」 같은 영화를 단체로 보러 가곤 했던 오류극장보다 훨씬 후줄근한 극장이었는데, 그녀가 다닌다는 교회가 개봉극장 바로 옆에 있었던 것이다. 두 시에 교회에 나와 여덟 시 정도면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내가 입수한 정보였다. 한 시 반에 도착해 삼십 분쯤 기다리니 과연 그녀가 나타났다. 흰 블라우스에 초록 치마 교복을 입은 그녀를 보자 어둠 속에서 성냥불을 켠 것처럼 개봉동이, 그리고 세상이 환해졌다.
  교회 앞에 서 있는 나를 본 그녀는 생각만큼 놀라는 것 같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내가 교회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을 것을 미리 알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녀는 잠깐 멈칫 서서 나를 바라보더니 아주 짧은 눈인사를 하고 교회로 들어가 버렸다.

  4. 교회 앞에는 작은 개천이 흐르고 있었고 개천을 따라 버드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그녀가 교회 안으로 사라진 뒤 나는 버드나무 그늘에 서서 나의 사랑을 시작했다. 나는 일방적으로 그녀를 사랑하기로 결심했고, 그녀가 교회에서 나올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려 주는 것이 열아홉 소년이었던 내가 생각한 사랑법(法)이었다.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미동도 없이 석상처럼 완벽한 기다림의 부동자세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하게 된 나의 방법이었다. 요즘에는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때 나에게 '사랑은 움직이지 않는 것', 즉 '그녀에게 부동(不動)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날 나는 거기 꼼짝도 않고 서서 여덟 시까지 여섯 시간 동안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 여섯 시간 동안 나는 단 1초도 '그녀'라는 화두를 놓쳐 본 적이 없다. '그녀'는 부처처럼 내 마음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고, 내 머릿속에서는 그녀의 얼굴이 불꽃놀이의 불꽃들처럼 쉴 새 없이 피었다 사라졌다 하고 있었고, 그걸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이 거짓말처럼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순간들이, 내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나를 행복하게 했다. 그것은 하나의 참선(參禪)이었다. 그때 내가 죽어 화장을 했으면 혹시 사리가 나왔을까.

  5. 어둑어둑해질 무렵 그녀는 교회에서 나왔다. 그녀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놀라는 기색 없이 눈인사를 한 다음 버스 정거장으로 걸어갔다. 마침내 참선에서 깨어난 나는 그녀를 멀찌감치 뒤따라가 그녀가 버스를 타고 떠날 때까지 정거장 언저리에 서 있었다. 수원으로 가는 밤차 안에서 나는 내 인생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6. 그 다음 토요일, 그 다음다음 토요일에도 그녀와 나의 기묘한 의식은 계속됐다. 두 시쯤의 눈인사와 헤어짐, 버드나무 그늘에서의 '그녀'를 향한 용맹정진(勇猛精進), 여덟 시쯤 또 한번의 눈인사, 그리고 버스 정거장에서의 배웅. 배웅이라고는 하지만 그녀는 기다리는 내게 눈인사를 하고 나를 지나쳐 가서는 한번도 뒤돌아보는 법이 없었고, 나는 지금도 그녀가, 내가 자기가 탄 버스를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한 자리에 붙박여 서서 바라보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을까 궁금하다. 한 가지 실마리는 있다. 집이 이대 앞인 그녀가 늘 타던 100번 버스는 개봉동이 시발점이었기 때문에 빈자리가 많았을 텐데 늘 맨 뒤에 앉아서 갔다는 사실. 그래서 먼지로 얼룩진 버스 유리창으로 보이던 그녀의 단발머리, 그리고 그 밑으로 드러난 그녀의 흰 목이 은가루를 뿌린 것처럼 반짝이며 멀어져 가던 모습이 내 가슴에 새겨져 있다. 아직도 다니는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도 100번 버스를 생각하면 가슴에 파도가 인다. 
             
  7. 그렇게 다섯 달이 흘러갔다. 10월이었다. 그 사이 하복은 동복으로 바뀌었고, 예비고사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갑자기 대학에 가고 싶어졌다. 포기하고 방황하고 술 마시는 나날에서 벗어나 딱 한 달만 공부를 해 보자고 생각했다. 그녀가 학교에서 1, 2등을 다툰다고 우리 반의 친구 녀석에게 들은 것이 자극이 되었을까.
  13일이라고 기억한다. 토요일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녀'라는 화두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이번을 마지막으로 한번도 거르지 않았던 토요일의 의식을 끝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첫 만남에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로 스물 몇 번째의 토요일이 지나갔지만 우리는 한번도 서로에게 말을 건넨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말을 하고 싶은 적도, 말을 듣고 싶은 적도 없었다. 나는 내 나름의 사랑법에 몰두해 있었으며, 토요일마다 건네는 두 번의 짧은 눈인사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믿음을 계명(誡命)처럼 가슴 한쪽에 새겨 놓고 있었다.

  8. 우리의 마지막 토요일, 언제나처럼 교회 앞에 서 있는데, 다섯 시쯤 되자 종일 찌푸렸던 하늘에서 눈발이 비치기 시작했다. 첫눈이었다. 첫눈이지만 팝콘만 하게 눈송이가 굵은 함박눈이었다. 바람이 전혀 불지 않았으므로 눈은 곧 어깨 위에, 교모(校帽) 위에 쌓이기 시작했다. 여덟 시가 다 돼 오자 길바닥에 쌓인 눈은 거의 5센티에 가까웠다. 나는 모자와 어깨에 쌓인 눈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다시 말해 내 사랑의 마지막을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그녀에게 가장 완벽한 부동의 자세를 보여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내 모자 위에 쌓여 있던 눈더미가 눈앞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놀라 돌아보니 이번에는 내 어깨로 희디흰 손을 뻗치는 그녀가 보였다. 그녀가 거기 서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나오는 것을 보지도 못했는데 언제부터였는지 그녀가 소리도 없이 거기 와 서 있었다. 눈이 수북이 쌓여 있는 그녀의 단발머리가 보였다. 우리 둘 사이로 눈송이는 계속 떨어져 내리고 있었고 눈송이 사이로 눈물에 젖은 그녀의 두 눈이 보였다. 우리의 마지막 토요일, 내 작은 사랑의 끝 페이지.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자전거가 멈췄다>

  1. 끝없이 펼쳐진 사막 한가운데 어떤 결의처럼 또는 지향처럼 느닷없이 우뚝 솟아오른 하나의 엄청난 바윗덩어리. 하나의 바위로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에이어스 록(Ayers Rock)은 호주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높이 348미터, 폭 3.6킬로미터, 둘레 9킬로미터인, 그냥 바위라고 부르기에는 미안하다는 생각까지 드는, 거대한 산이다. 저물녘이면 석양에 물든 에이어스 록은 자연의 위대함을 시위하는 성화(聖火)가 되어 불타오른다. 그 에이어스 록의 정상에 올라가 본 사람이라면 정상임을 알리는 조형물 옆에 빨간 자전거 한 대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 그 자전거는 그곳에 이르러 비로소 멈춰 섰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이르기 위해 자전거에 한 생애를 싣고 달려갔던 한 사람이 있었다.

  2. 퇴근길에 우편함을 열어 보니 편지가 한 통 들어 있었다. 후지산이 그려진 우표가 붙은, 일본에서 온 편지. 발신인은 이토 히로미(伊東弘美), 낯선 이름이다. 일본에서 내게 편지를 보낼 사람이라고는 단 한 사람, 미치코밖에 없기 때문에 그 편지를 집어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좋지 않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그 예감은 금방 현실로 나타났다.
  봉투 속에는 A4 용지 한 장, 작은 메모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A4 용지에는 「자전거가 멈췄다(自轉車が とまった)」라는 제목의 신문 박스 기사가 복사돼 있었다. '지난 8년 동안 자전거로 세계의 다섯 개 대륙을 주파한 여행가 마루치 미치코(丸地道子) 씨가 지난 3월 14일 일본알프스의 기소산맥(木曾山脈)을 등반하던 중 눈보라를 동반한 악천후 속에 실종되었다가 나흘 만에 사체로 발견됐다'는 것이 기사의 내용이다. 히로미라는 친구가 쓴 메모에는 '미치코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에 장상(張さん)이 보낸 편지 뭉치를 발견하고 아무래도 소식을 알려야 할 것 같아 이렇게 서신을 보낸다'고 적혀 있었다.

  3. 마루치 미치코, 우리 한자음으로 읽으면 환지도자(丸地道子), 글자 그대로 '둥근 땅 길의 아이'였던 여자, 도(道)를 우리말 '길'로 바꿔 내가 '길자'라고 불렀던 여자.
  자전거가 멈췄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미치코의 죽음을 실감할 수가 없었다. 미치코, 과연 너다운 종지부(終止符)로군!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니 어쩌면 나는 호주에서 헤어진 이후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되리라는 것을, 언젠가 이런 식의 결별(訣別)을 맞으리라는 것을 확신에 가깝게 예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중요한 시험에서 답안지는 절반도 못 채웠는데 종이 울린 것처럼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슬픔은 거북이처럼 아주 느리게 그러나 끈질기게, 눈석임물처럼 더디게 그러나 차디차게 남아 있는 나의 인생을 적시게 되겠지.
  그래, 그렇다. 미치코와 나는 길 위에서 만나 '우리'라는 말로 묶여 두 번의 여행을 함께 했고, 처음 만난 이후로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래서 나는 미치코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 일본에 있는 미치코의 친구는 스물다섯 명이라는 것. 히로미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다.

  4. 내가 미치코를 처음 만난 곳은 중국의 서쪽 끝에 있는 도시 카슈가르다. 한자로는 객십(喀什)이라고 쓴다. 벌써 6년 전 일이다. 그때 내가 중국에서 어슬렁거릴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10년째에 접어든 직장 생활에 넌더리를 내고 있을 무렵 6개월 동안의 중국 연수 기회를 얻은 것이다.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 만드는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중국에 도착해 시안(西安)에 있는 시베이(西北)대학에 적을 두고 있었지만 애초에 연수 목적인 중국어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2주일을 못 채우고 배낭을 꾸려 여행을 떠났다.
  둔황의 막고굴(莫高窟), 투루판의 화염산(火焰山 ? 손오공의 본거지였다), 우루무치의 천지(天池)를 지나고 천산산맥(天山山脈)과 타클라마칸사막을 건너가며 나는 지난 10년 동안 한 편도 못 썼던 시를 수십 편 썼다. 하룻밤에 세 편을 쓴 적도 있다. 걸어 다닐 때는 머리통이 흔들리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그 속에 가득 담긴 시들이 쏟아져 사라질 것 같았으므로.

  5. 카슈가르에 이른 것은 시안을 떠난 지 거의 한 달 만이었다. 카슈가르에는 써만루(色滿路)라는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라가면 써만빈관(色滿賓館)이라는 호텔이 나온다. 카슈가르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차를 내려 써만빈관에 짐을 풀고 나니 점심시간이 겨워 있었다.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호텔 앞에 있는 노천 카페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미치코를 만났다.
  시간이 늦어 종업원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 노천 카페의 탁자 앞에 자그마한 체구의 동양 여자가 홀로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옆에는 빨강색 자전거가 한 대 세워져 있는데 프레임에 'WOMEN'이라고 써 있는 것이 눈길을 끌었다. 그렇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우먼(WOMAN)이 아니라 위민(WOMEN)이라, 그럼 다른 여자는(또는 여자들은) 어디 갔을까' 잠깐 실없는 궁금증이 일기도 했다.
  특히 여자에게는 낯가림이 심한 내가, 더구나 잉글리시는커녕 콩글리시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어떻게 그녀에게 말을 붙여 볼 엄두를 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처음에 무슨 말을 했던가도 기억에 없다. 종업원은 어디 갔는지, 이 집에 어떤 음식이 맛있는지, 또는 카슈가르에 온 지 얼마나 됐는지, 틀림없이 이런 하찮은 질문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때의 질문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 또는 설렘이다. 내 기억의 전시장에는 그때 나를 이끌리고 설레게 했던 그 그림,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단아하게 앉아 고개를 약간 숙인 미치코의 모습이 가장 좋은 자리에, 가장 좋은 액자에 표구되어 걸려 있다.

  6. '일본에 있는 친구가 스물다섯 명, 이제부터 스물다섯 통의 편지를 써야 해요.'
  내 기억에 남아 있는 미치코의 첫마디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편지지를 덮고 웃으며 나에게 의자를 가리켰다. 그렇게 대화가 시작됐다. 미치코의 나이는 친구 숫자와 같은 스물다섯, 고교를 졸업한 뒤에 잠깐 취직을 했다가 3년 전에 자전거를 타고 세계 여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유럽과 아프리카를 거쳐 지금은 세 번째 대륙에서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웃을 때면 덧니가 살짝 드러나 귀엽기만 한 이 작은 여자가 어떻게? 바보처럼 묻고 말았다. 왜냐고, 왜 그런 일을 할 생각을 했느냐고.
  '그냥. 자전거가 좋고 여행이 좋아서 그냥.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잖아요.그렇죠'?
  그렇고말고. 그러나 하고 싶다고 다 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마음이 있는 곳에 길이 있지요. 그리움이 크면 길이 스스로 열린다는 것. 길에서 배웠어요.'
  그럼, 그렇고말고. 나는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여자를 스승으로 모시기 시작했다.
  '스페인에선 스페인말, 프랑스에선 프랑스말 배웠지만 떠나면 다 잊게 돼요. 지금 편지 쓰면서 보니 일본말도 잊어버린 게 많네요.'
  미치코가 이런 말을 하며 웃을 때 나는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했던 것일까. 다시 평생의 지병(持病)인 짝사랑에 한쪽 가슴을 내주기로 했던 것일까. 그날 우리는 저녁이 다 돼서야 두붓국에 밥을 말아 먹고 헤어졌다. 생각해 보니 미치코의 얘기를 듣느라 배고픈 것도 잊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미치코를 생각하며 시를 한 편 썼다.

<여행자들>

하늘에 아름다운 무늬 남기는 새들처럼
땅에는 너희들이 있구나 여행자들
길들이 너희를 향해 바삐 달려오고 있구나

  7. 다음날부터 미치코와 나는 친구가 됐다. 우리는 카슈가르 시장에 가서 중국 돈 백 원을 주고 중고 자전거를 한 대 샀다. 나도 미치코의 자전거 여행에 동참하기로 한 것이다. 닷새 뒤에 카슈가르를 떠난 우리는 타클라마칸사막을 남쪽으로 돌아 체모(且末)까지 스무 날 남짓 함께 여행을 했다. 나도 스무 살 무렵 두 달 가까이 자전거로 전국일주를 한 경험이 있어서 자전거라면 누구보다 자신이 있는 터였지만 미치코는 나보다 한 수 위였다. 그 작은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지, 혹시 자전거로 위장한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으니.

  8. 체모에서 나는 자전거를 버리고 시안으로 돌아왔다. 미치코는 티베트로 가기 위해 티베트의 입구인 거얼무를 향해 떠났다. 물론 'WOMEN'을 타고.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고, 겨울옷을 비롯한 월동용품이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티베트에 가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다. 더구나 몇 천 미터의 고지대인 티베트에 어떻게 자전거를 타고 간다는 말인가. 그러나 미치코는 단호했다. 길이 있으면 갈 수 있고, 정 못 가면 지나가는 트럭을 잡아타고라도 가겠다는 것이었다. 나의 지병은 짝사랑만이 아니다. 또 하나의 지병은 비겁함이다. 하기야 짝사랑만을 거듭하는 것은 비겁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어쨌든 나는 또 한번 비겁한 선택을 하고 말았다. 미치코를 티베트로 보내고 시안으로 돌아가 쓰디쓴 후회와 자기모멸로 얼마나 참담한 나날을 보냈는지.

  9. 미치코가 아시아와 아메리카에 이어서 마지막으로 오세아니아 대륙에 도전한 것은 지난해의 일이었다. 그동안에 나는 중국 연수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으며, 6개월의 휴식에도 불구하고 계속 넌더리를 내게 하는 직장 생활을 13년 만에 접고 백수 노릇을 시작했다. 라싸에서, 뭄바이에서, 시애틀에서, 그리고 푼타아레나스에서 날아오던 미치코의 편지가 나의 결심을 부추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호주 중부에 있는 도시 앨리스스프링스에서 미치코와 나는 두 번째 만났다. 8년에 걸친 미치코의 자전거 세계여행이 끝나갈 무렵 나는 마침 호주에 머물고 있었다. 호주 남쪽의 도시 애들레이드에서 공부하고 있는 내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러 한 달 예정으로 호주에 갔던 것이다.
  5년 만에 만난 미치코는 하나도 변함이 없었다. 나이가 서른이 됐지만 아직도 귀여운 소녀 같은 모습. 아무도 이 여자를 8년 동안이나 자전거로 세계를 누빈 '강철의 여인(앞에서 말한 신문 기사의 표현이다)'으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자전거는 분명 새것으로 바뀌었을 텐데도 여전히 빨강색 프레임의 'WOMEN'이었다.

  10. 미치코의 마지막 목적지는 호주 원주민 말로 울루루라고도 불리는 에이어스 록이었다. 미치코와 나는 앨리스스프링스에서 에이어스 록까지 470㎞를 오랜만에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에이어스 록 앞에 도착하니 연방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8년 동안 자기 이름(丸地)처럼 둥근 지구를 이리저리 빙빙 돌아서 이곳에 이른 한 동양 여인을 취재하기 위해서 기자들이 몰려와 있었다. 우리는 자전거를 끌고 에이어스 록의 정상에 올랐다. 정상의 표석 옆에서 노던테리토리주(州)의 주지사가 참석한 가운데 간단한 환영식 겸 기념식이 열렸다. 주지사는 환영 연설에서 미치코의 장거(壯擧)를 기념하기 위해 미치코의 자전거를 에이어스 록의 정상에 영구히 보존하고, 기념판을 설치해 사람들에게 미치코가 해 낸 일을 널리 알리겠다고 약속했다.
 
  11. '축하한다, 미치코. 드디어 해냈구나.'
  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져 둘만 남았을 때, 나는 손을 내밀어 미치코의 작은 손을 잡았다. 한참을 말이 없던 미치코가 입을 열었다.
  '장상, 이 자전거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그러더니 허리에 차고 있던 벨트색에서 종이를 꺼내어 무엇인가를 쓰더니 내게 건네준다.
  '自行車是我. 自行車是?. 自行車是我們.'
  중국어로 이렇게 적혀 있다. '自行車'는 자전거를 뜻하는 중국말, 즉 '자전거는 나. 자전거는 너. 자전거는 우리.'라는 뜻이다. 그랬구나. 'WOMEN'은 '우먼'의 복수인 '위민'이 아니라 중국어 '我們(우리)'의 발음기호 '워먼'이었구나. 갑작스런 깨달음으로 멍해져 있을 때 미치코가 말했다.
  '자전거는 앞으로 가지 않으면 쓰러질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에요. 결코 후진할 수는 없지요. 그런 의미에서 자전거는 인생과 똑같아요.'
  미치코의 표정이 그럴 수 없이 쓸쓸해 보였다.
  '그리고 오늘 저의 자전거는 멈췄어요.'
  에이어스 록의 정상에서, 그녀가 그토록 열망한 끝에 다다른 목적지에서, 그녀를 그곳까지 태우고 온 'WOMEN(우리)'을 옆에 두고 미치코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청춘은 아름다워라>
 
  1. 내 청춘이 아름답다고, 또는 아름다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아름답기는커녕 남루하기 이를 데 없었던 내 청춘의 나날들. 청춘은 늘 내게 벗어 던지고 싶은 짐이었고, 갚을 수 없는 빚 같은 것이었으며, 한마디로 말하자면 '거지 같음'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청춘을 본 적은 있다. 해가 뜨면 스러지고 말 풀잎 끝 새벽이슬을 보는 것처럼 너무나 아름다워 안쓰럽기까지 했던 그런 청춘을 만난 적이 있다. '추억을 먹고 산다'는 것이 실제로, 즉 물리적으로 가능하다면, 나는 이 추억 하나로 한 십년은 족히 버텨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2. 내가 그 아이들, 크리스티와 크리스를 만난 것은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 있는 바츨라프 광장에서다. 나는 회사에 휴가를 내고 배낭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으며, 체코는 루마니아와 헝가리에 이어 그 여행의 세 번째 나라였다. 그날 아침 기차편으로 프라하에 도착해 블타바 강(스메타나 작곡의 '몰다우'는 블타바 강의 독일어 이름이다) 이쪽저쪽으로 부지런히 쏘다닌 뒤끝이라 저녁 무렵 바츨라프 광장에 이르렀을 때는 다리도 아프고 목도 말라 왔다. 흑맥주를 한 병 사 들고 다리쉼을 할 자리를 찾아 광장 주변에 있는 벤치들을 기웃거리는데 빈 곳이 눈에 띄지 않았다. 일과를 끝낸 프라하 시민들, 특히 연인들이 쌍쌍이 몰려나와서 저녁 한때의 다디단 휴식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어디 길바닥에라도 앉아야겠다 싶어 발길을 돌리는데 그녀가 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해는 이미 지고 없는데 햇빛의 입자들을 물에 헹궈 발라 놓은 것처럼 맑게 반짝이는 얼굴을 하고, 어깨까지 넘실거리는 긴 금발, 눈부시게 빛나는 흰 원피스에 감싸인 한 여자, 소녀라고 하기에는 어른스럽고, 여인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어린 한 여자가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고 쓴다면 나는 그때 내 느낌의 5%도 표현하지 못한 것이 된다. 한참을 홀린 듯 우두망찰  서서 그녀를 바라보다 나는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중국의 카슈가르에서 미치코를 만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 또는 설렘'이 내게 용기를 주었던 것이다.

  3. '앉아도 되겠습니까'라는 내 말에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내가 그때까지 들어 왔던 어떤 목소리보다 더 부드러웠다. 더구나 그녀는 내가 영어에 서투르다는 사실을 첫밗에 알아채고 글씨에 비유하자면 필기체 발음에서 활자체 발음으로, 다시 말해 단어 하나하나를 따로 또박또박 발음기호를 읽는 것처럼 정확히 소리냄으로써 내가 훨씬 편안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녀, 크리스티는 스웨덴에서 온 대학생이었다. 나이는 열아홉, 두 살 차이인 남동생과 함께 방학을 맞아 동유럽을 여행하는 중이라고 했다. 얘기를 하다 보니 우리가 서로 비슷한 경로로 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행을 하면서 겪은 일, 기억에 남는 여행지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우리는 같은 여행자로서 친밀감을 느꼈다.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지방에 있는 드라큘라 성을 찾아가느라 고생했던 얘기, 부다페스트의 밤풍경, 특히 페스트 쪽에서 강 건너로 바라보는 부다 왕궁의 야경이 얼마나 멋진가 하는 얘기를 우리는 서로 맞아, 그래, 나도 그랬는데 너도 그랬구나,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쳐 가며 나누었다. 그래서 내가 참으로 맛있게 먹었던 헝가리의 굴라시 수프를 그녀가 별로였다고 깎아내렸을 때 섭섭한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4. 우리는 프라하에 와서 가 본 곳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카를 다리를 장식한 아름다운 조각상들, 대통령궁 앞에 서 있던 멋진 근위병, 카프카 생가에 남아 있는 작은 책상에 새겨진 글씨, 그리고 옛 시청 건물에 있는 시계탑에 대해서. 내가 시계탑 얘기를 꺼냈더니 그녀는 오늘 들었다며 그 시계탑에 얽힌 전설을 내게 얘기해 주었다. 그 시계탑에 설치된 시계는 15세기에 카를 대학의 한 수학교수가 발명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독창적인 기술과 아름다움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자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은 것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밀려들었다. 이 시계를 독점하고 싶었던 프라하의 지배자는 이 교수가 다시는 똑같은 시계를 만들 수 없도록 눈에 독을 부어 장님으로 만들어 버렸다. 여기까지 얘기한 크리스티는 왠지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그러다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나는 소스라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눈이 멀었어요. 나처럼 말이죠.(So he became blind like me.)'

  5. 말은 재미있게 하면서도 그녀의 시선이 한 곳으로 가 있는 것을 나는 의례적인 낯가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녀가 너무 눈부시게 아름다워 나는 감히 그녀와 눈을 마주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가 자기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는 암흑 속에 살고 있다니. 나는 한동안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드라큘라 성과 부다페스트의 야경, 카를 다리와 카프카 생가에 대한 세세하고 생생한 묘사는 직접 눈으로 보지 않으면 절대로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충격에서 벗어난 내가 막 그것에 대해 질문하려고 할 때 그녀의 동생 크리스가 나타났다. 손에는 햄버거와 콜라 깡통이 담긴 종이봉지를 들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가족임을 알 수 있을 만큼 두 사람은 닮은꼴이었다. 누나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크리스도 참으로 잘 생긴 소년이었다. 마침 체코 돈이 떨어져 환전하는 데 시간이 걸려 늦었다고 그 아이는 누나에게 미안해했다. 누나가 나에 대해서 짧게 설명하자 크리스는 내게 누나가 지루하지 않게 해 줘서 고맙다고 예의바르게 인사를 차렸다. 그 아이 역시 누나에게 얘기할 때는 필기체 발음이었지만 내게 말할 때는 활자체 발음을 해 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나의 의문은 저절로 풀렸다. 크리스가 누나에게 나에 대한 모든 것,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말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크리스티는 내가 금테 안경을 끼고, 수염을 지저분하게 길렀으며, 파란 야구 모자를 쓰고 있는 삼십대 중반의 꾀죄죄한 남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내가 검은색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어 한국에서 온 여행자로서 그 안에 무엇을 넣고 다니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가방을 열어 여행 안내서인 「세계를 간다 - 동유럽 7개국」과 카프카 소설 「성채(城砦)」, 그리고 다용도칼, 지도, 수첩 같은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꺼내 그녀에게(물론 크리스의 눈과 입을 통해) 보여 주었다. 루마니아에서 헝가리에서, 드라큘라 성의 망루에서, 부다페스트의 밤 강변에서, 그리고 이 바츨라프 광장에서 크리스는 이런 식으로 눈먼 누나에게 하나씩 하나씩 사진을 찍듯 설명을 해 주었던 것이고, 그래서 크리스티는 나보다 여행지에 대해 더 자세한 정보와 더 많은 느낌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6. 그날 바츨라프 광장의 벤치에 앉아 나는 이 아름다운 청춘들의 여행의 한 장면에 우연히 동행하게 된 것에 대해 감사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청춘들이 한구석에 피어 있다면 세상도 때로 아름다울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렇다면 남루한 내 청춘을 위해서도 건배! 속으로 외치며 흑맥주 병을 크리스티와 크리스의 콜라 깡통에 힘차게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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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부 <고등학교 3종 세트>

◇장승욱 어록
    술비 : 일찍이 조정권 시인은 비를 바라보는 마음의 형태를 일곱 가지로 나눈 바 있지만, 술꾼들에게 비를 바라보는 마음이란 둘일 수가 없다. 비 내리는 날 술꾼이 술을 마시는 것은 빗방울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땅으로 떨어지는 이치와 다를 것이 없다. 술꾼들은 자기의 살과 피 속에 살고 있는 슬픔의 아이들을 불러내는 비의 호명에 귀 기울이면서 더 큰 슬픔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모든 비는 똑같다. 술비인 것이다.

    비술(秘術) : 비를 술로 바꾸는 비밀스러운 방법.


  <받아쓰기 사건> 

  1.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첫날 아침, 나는 교실에 앉아 형기(刑期)가 아직도 1년이나 남아 있다는 사실에 심난해하는 한편으로 2년 동안 잘도 버텨 왔구나, 스스로를 대견해하고 있었다. 그때 담임이 출석부를 들고 들어왔다. 학생들을 죽 한번 훑어본 담임의 첫마디.
  '장승팔이 누구야. 일어나 봐.'
  이런 변이 있나. 나는 내게 관심을 가진 선생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아하, 너였구나. 우리 앞으로 잘해 보자. 앉아.'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오래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네 싶었다. 이것이 나의 은사인 유근팔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다.

  2. 국내파, 연안파, 그리고 친소파. 해방 뒤 북한에 모여든 공산주의자들을 나눌 때 쓰는 이름들이다. 고등학교 때 우리에게도 이런 분류가 적용됐다. 사는 곳이 어디인가가 분류의 기준이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이른바 '특수지(特殊地) 고등학교'로, 서울의 변두리 가운데서도 최말단(最末端)에 자리 잡고 있었다. 광화문과 온수동 사이를 오가는 123번 버스의 온수동 종점 바로 전 정거장이 우리 학교였다. 전철이 있기는 했지만, 광화문에서는 적어도 한 시간, 서울의 다른 변두리에서 통학하려면 두 시간도 넘게 걸리는 거리였으므로 많은 학생들이 통학 시간을 줄여 공부할 시간을 늘리기 위해(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학교 주변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특수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학교 안에는 기숙사도 마련돼 있었는데, 국내파란 이 기숙사에 근거지를 마련한 운 좋은 몇 십 명의 학생들을 가리킨다. '운 좋은'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기숙사가 비용과 시간 활용의 측면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했으며, 따라서 기숙사에 들어가려는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성적,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 같은 것이 심사 기준이었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담임의 추천이었으므로 국내파의 대부분은 공부 잘하고 교과서적인 인생관을 가진 모범생들이었다.
  학교 뒷문으로 나가서 이삼 분쯤 걸으면 되는 거리에 꽤 큰 규모의 연립주택 단지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하숙을 하고 있는 학생들이 연안파로 불렸고, 마지막으로 친소파는 집을 나와서 생활하고 있는 학생들 가운데 국내파와 연안파를 뺀 나머지 전부를 지칭했다. 학교 앞에는 경인선 철로가 지나고 있는데, 친소파는 거의 모두가 이 철길을 건너야 학교에 올 수 있었으므로 철길파로도 불렸다. 그런데 집에서 통학하는 친구들을 지칭하는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다. 국내파, 연안파, 친소파가 모두 공산주의자의 한 분파였던 것처럼 우리들이 썼던 세 가지 분류는 집을 떠나 있다는 공통점을 바탕에 깔고 있었던 것이다.
 
  3. 3학년 1학기, 나는 뜻밖에 국내파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앞에서 '국내파의 대부분은 공부 잘하고 교과서적인 인생관을 가진 모범생들'이라고 했는데, 공부는 반에서 바닥을 기고 있었고, 교과서적인 인생관은커녕 교과서라고는 거의 읽어 본 적도 없는 내가 국내파에 잠입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담임의 추천 때문이었다. 나의 담임인 유 선생님은 국어를 맡고 있었고, 그래서 2학년이 끝날 무렵 치러진 국어 경시대회에서 1등을 한 나에게 당연히 큰 호감과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1학년 때부터 공부를 작파하고 수업시간에는 교과서 밑에 소설책 깔고 읽기, 수업이 끝나면 술 마시기를 유이(唯二)한 세월 보내기 수단으로 삼고 있었던 내게 문제가 거의 교과서 밖에서 출제되는 경시대회는 오히려 식은 죽 먹기였는데, 유 선생님은 그런 나를 오해해 애제자(愛弟子) 후보로 삼은 것에 더해 기숙사 입사생(入舍生)으로 추천까지 해 주었던 것이다. 입사생 결정은 다행히 첫 월말고사가 있기 전에 이뤄졌다. 3월의 월말고사에서 나는 61명 가운데 58등을 차지함으로써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으니.   

  4. 어느 날 국어 시간, 한자 받아쓰기 시험이 있었다. 세 명씩 칠판 앞에 나와 선생님이 불러 주는 단어를 한자로 써야 했다. 이를테면 독립(獨立), 과정(過程), 애정(愛情) 같은 낱말들. 아무리 고등학생이 되면서 공부라는 것에서 손을 놓았지만 한자라면 자신이 있었다. 내가 네 살 때 한글을 깨치자 아버지는 나에게 매일 신문의 사설을 소리 내어 읽게 했다. 그때 사설은 한자투성이였고, 아버지는 내가 막힐 때마다 한 자 한 자 자세히 써 가면서 가르쳐 주셨다. 아버지 나름의 영재교육이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무렵에는 신문의 사설을 댕글댕글 막힘없이 읽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5. 이윽고 내 순서가 됐다. 분필을 손에 쥐고 기다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던져지는 문제가 '소주'였다. 소주는 원래 '燒酒'라고 써야 맞는다. 그런데 나는 일필휘지 '燒酎'라고 썼다. 그때 나는 교내의 술꾼 가운데 지존으로 군림하고 있었고, 하루에도 몇 병씩 쓰러뜨렸던 소주병에 '희석식소주(稀釋式燒酎)'라고 쓰여 있는 것이 어느새 머리에 뚜렷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다른 두 친구는 소(燒) 자도 못 써서 더듬거리고 있는데 내가 '燒酎'라고 거침없이 쓰자 교실에서는 와아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유 선생님이 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얼굴에는 알 듯 모를 듯 미소가 떠돌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주'라는 문제는 의도적인 것이었고, 그 미소에는 '요놈, 걸렸지'하는 득의(得意)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내 앞에 와서 내 눈을 한참 말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한마디.
  '엎드려. 이유는 네가 알고 있지'?               
  물론 알고 있고말고. 나는 자동인형처럼 선생님 앞에 엎드렸다. 엉덩이를 빌려주는 데는 이미 이골이 나 있었다. 나는 월요일마다 있는 조회와 일주일에 두 번 있는 교련 시간에 나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으므로 대신 조회와 교련이 끝난 뒤 학생부실로 불려가 엉덩이를 잠시 빌려주는 것으로 해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나는 정답을 썼다는 이유로 걸렛자루로 '빳다'를 열 대 맞았다. 형편없는 내 성적에도 불구하고 담임이 나에게 애정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교련이나 체육 선생에게 얻어터질 때보다는 훨씬 덜 아프게 느껴졌다.

  6. 그 일이 있기 전 어느 날, 나는 이발소에 가서 경상도에 있는 어느 절에 출가하게 됐다는 거짓말까지 해가며 머리를 하얗게 배코쳐 버렸다. 이유는? 글쎄, 심심해서라고 할까?
다음날 아침 조례 시간. 반짝반짝 빛나는 내 머리를 발견한 담임은 거의 울 듯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얌마. 머리 어떻게 된 거야.'
  '깎였어요.'
  '어떤 놈이야. 어떤 놈이 머리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어'?
  담임은 당장 쫓아가서 범인을 요절내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 나는 한동안의 침묵으로 긴장을 고조시킨 뒤 대답했다.
  '이발사가요.'
  교실 안에서는 폭소가 터져 나왔고, 담임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 되어 버릇없는 제자를 한참 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담임이 나를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7. 담임에게 '빳다'를 맞은 그날 밤 열 시쯤 되었을까, 기숙사에 있는데 한 친구가 나를 불렀다. 누가 나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내가 이 학교의 지존으로 소문나 있던 터라 다른 학교의 술꾼들이 술시합을 하자고 찾아오는 일이 가끔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일이겠거니 싶어서 기숙사 문밖으로 나가 보니 웬걸 담임선생님이 서 있었다.
  '나 오늘 숙직이다. 따라와.'
  앞장서 걷는 선생님의 손에는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는 소주 세 병과 종이컵, 구운 오징어, 그리고 멘소래담 한 통이 들어 있었다. 그날 밤 운동장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선생님과 나는 소주 세 병을 비웠다. 소주병 세 개가 다 쓰러져 뒹굴 때까지 그저 잔이 비면 채워 줄 뿐 담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들어가라.'
  마지막 잔이 비워지자 선생님은 이 말 한마디를 남기고 휘청휘청 숙직실 쪽으로 사라졌다.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울퉁불퉁해진 엉덩이에 멘소래담을 바르며 생각에 잠겼다. 선생님이 말을 많이 했더라면 나는 오히려 반발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선생님의 말없는 말을 알아들었다. 명색이 국어 선생이고, 나도 또 국어 경시대회 1등 아닌가.
  그 이후 나는 술과 소설책 읽기만으로 구성된 나의 세계에 교과서와 도서관의 시간들을 조금 편입시키기로 했다. 오래잖아 '닦고 조이고 기름 치기'에는 내 머릿속에 슬어 있는 녹이 너무 두껍다는 사실을 깨닫기는 했지만 말이다.   

  <첫눈 사건>

  1.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친소파(되풀이하지만 국내파는 학교 안의 기숙사, 연안파는 학교 뒤쪽에 붙어 있는 연립주택 단지에 근거지를 마련한 친구들을 가리켰고, 친소파는 집을 나와서 생활하고 있는 학생들 가운데 국내파와 연안파를 뺀 나머지 전부를 지칭했다)였다. 어머니가 하숙이라고 잡아 주신 곳이 이종 사촌누나의 시누이 집이었다. 어머니가 사돈집에 나를 맡기기로 작정한 건 그만큼 잘 먹이고 재워 줄 것이라는 계산도 작용했겠지만, 그보다는 딴 짓은 안 하는지 감시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내게는 보통의 하숙집처럼 편한 곳이 아니었다. 그때 있었던 이야기 하나.

  2. 어느 날 무슨 이유였던가 기억은 안 나지만 수업이 오전에 끝났다. 기다렸다는 듯 영팔이가 옆구리를 찔렀다. 한잔하자는 신호였다. 영팔이는 그 시절의 술벗으로, 부유한 부모를 둔 덕에 학교 옆에 집 한 채를 통째로 세내어 살고 있었다. 집에 도착해 녀석이 꺼내 온 것은 이름만 듣던 조니워커, 그것도 1리터짜리 큰 병이었다. 본가의 다락에서 두 병을 슬쩍해 왔다는데, 그때야 조니워커에 블루, 블랙, 레드 같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 턱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블랙이었던 것 같다. 영팔이와 나는 마주앉아 술잔을 뒤집기 시작했다. 한 병이 금방 바닥이 났다. 지금이라면 아까워서라도 그러지 않았겠지만 우리는 서슴없이 새로운 병의 마개를 열었다.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또 한 병의 조니워커가 빈 병으로 남았다. 그때 나는 저녁마다 종로 2가 뒷골목에 있던 어느 단과 전문 학원에서 종합영어 과목을 수강하고 있었는데, 그건 오로지 영어 소설을 번역이 아니라 원문으로 읽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3. 조니워커 두 병을 영팔이와 함께 비우고 나니 마침 학원에 갈 시간이었다. 나는 영팔이 집을 나와 광화문행 123번 버스에 올라탔다. 그 뒤에 술이 취해 무슨무슨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랬으면 재미있었겠지만 사실은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나는 학원에 가서 강의를 끝까지 듣고 말짱하게 하숙집으로 돌아갔고, 늦은 저녁을 맛있게 먹었으며, 밤이 되어 얌전하게 잠이 들었다. 그런 날들이 거듭되었다. 나는 거의 매일 술을 마셨지만, 하숙집 주인아주머니, 그러니까 내 이종 사촌누나의 시누이는 내가 3학년이 되어 기숙사에 들어갈 때까지 내가 구제불능의 술꾼이라는 사실을 한번도 눈치 채지 못했다. 아직도 그 분은 나를 공부밖에 모르는 얌전한 모범생으로 기억하고 있음을 나는 얼마 전 이종 사촌누나의 아들 결혼식에 갔다가 확인한 바 있다.
  조니워커 한 병을 마시고 학원에 갔던 그날, 종합영어 장문 독해에서 나는 '주브나일 딜링퀀시(JUVENILE DELINQUENCY)'라는 말을 배웠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소년 비행(少年非行)', 다시 말해 소년기에 저지르기 쉬운 잘못이라는 뜻이다.

  4. 그 시절의 이야기 하나 더. 나를 비롯한 친소파의 술꾼들에게는 단골로, 그것도 가락국수 같은 것을 먹으러가 아니라 소주를 마시기 위해 다니던 포장마차가 있었다. 무슨 하자가 있었던지 늘 손님이 없어서 우리 같은 미성년 술꾼들이 드나들기 편한 곳이었는데, 다른 포장마차와 마찬가지로 그 집에도 엉성한 차림표가 붙어 있었다. 종이 위에 매직펜 따위로 대강 끼적여 놓은 것이었는데, 물론 포장마차답게 닭똥집이 빠질 리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주인아주머니가 '똥' 자 위에 빨갛게 가위표를 그려 놓고 그 옆에 '변'이라고 써 놓았다는 것, 그리하여 닭똥집이 '닭변집'으로 변했다는 사실이었다. 아주머니는 닭똥집보다는 닭변집이 더 고상한 말이라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까까머리 어린 술꾼들에게는 그게 아니었다. 그냥 닭똥집, 할 때는 그런 생각을 안 했는데, '똥'을 일부러 '변'이라고 고쳐 놓으니 아, 닭똥집의 '똥'이 그 '똥'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술맛과 함께 그렇게 맛있게 먹던 닭똥집의 맛도 천리만리 달아나고 말았다. 닭똥집은 맛있었지만 닭변집은 너무나도 형편없는 맛이었던 것이다.
       
  5. 3학년이 되어 나는 국내파의 일원이 되었다. 앞에 썼던 것처럼 국내파의 대부분은 '공부 잘하고 교과서적인 인생관을 가진 모범생들'이었다. 법대 지망생이었던 용팔이는 그 대표적인 본보기라고 할 수 있는 친구다. 기숙사는 방 하나에 네 개씩의 이층 침대가 배열된 구조로, 여덟 명이 한 방을 쓰게 되어 있었는데, 용팔이는 나와 위아래 침대를 나눠 쓰는 사이였다. 3학년 1학기 초의 어느 날 아침, 아직 잠자리에 누워 있는데 위의 침대 옆으로 용팔이의 머리통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뜬금없이 하는 말이 이랬다.
  '승팔아. 내가 부탁이 한 가지 있다.'
  '뭔데'?
  '나, 이름을 바꿨거든. 오늘부터 나를 '삼병'이라고 불러 줘.'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올려다보니 용팔이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삼병은 삼병(三病)이고, 삼병은 세 가지 병이라는 뜻이 아니라 '고삼병(高三病) 환자'를 줄인 말이라는 게 용팔이의 설명이었다. 용팔이가 스스로 환자이기를 자청하고, 그렇게 불러 달라고 내게 부탁까지 하는 데는 자기는 앞으로 환자이니까 건드리지 말아 달라는 속뜻이 담겨 있었다. 용팔이는 근묵자흑(近墨者黑), 글자 그대로 먹 옆에 있다가 까매질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 먹은 물론 나를 가리킨다.
  6. 기숙사에서는 1주일에 한 번 고기 잔치가 열렸다. 아들들이 공부에 지쳐 몸을 상하지 않을까 염려가 된 어머니들이 돌아가면서 당번을 맡아 수요일 저녁마다 불고기를 해서 한 접시씩 나눠주셨던 것이다. 그래서 수요일은 술 마시는 날이었다. 기숙사에 있는 내 캐비닛의 서랍 속에는 언제나 술병이 뒹굴고 있었는데, 주로 하야비치나 로진스키 같은 보드카 종류였다. 소주와 위스키, 막걸리와 오가피주, 럼과 진을 섭렵한 끝에 가장 내 입맛에 맞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 보드카였다. 하야비치는 '하얗게 비친다'는 뜻이고, 로진스키는 진로(眞露)를 거꾸로 한 '로진'에 러시아 냄새를 풍긴답시고 '스키'를 붙여 지은 이름이다.
  어쨌든 기숙사의 몇몇 술꾼들은 수요일마다 식당에서 각자의 불고기 접시를 받아들고 내 방으로 모여들어 작은 주연(酒宴)을 열곤 했다. 용팔이도 위아래 침대를 쓰는 인연으로 가끔 끼어 술잔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리하여 제법 술맛을 익혀 가는 눈치였는데, 갑자기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다시 말해 '술 권하는 친구'를 상종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삼병이, 아니 용팔이는 그 이후로 지독한 '고삼병 환자'가 되어 1년을 보냈고, 당연히 원하는 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갔으며, 고시에 합격해 지금은 대법원인가 고등법원인가의 판사로 일하고 있다.
  마중지봉(麻中之蓬)이라는 말이 있다. 근묵자흑과는 반대로 착한 사람과 사귀면 그 감화를 받아 자연스럽게 착해진다는 뜻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근묵자흑도, 마중지봉도 맞지 않는 말인 것 같다. 용팔이가 반년이나 나와 아래위층에 살았으면서도 꿋꿋이 환자 노릇을 해 나간 것을 보면 근묵자흑은 말이 안 되고, 내가 용팔이 같은 훌륭한 친구를 사귀고도 닮아 보려는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마중지봉도 영 틀린 말이 아닐 수 없다.
         
  7. 국내파 시절에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교주(敎主)가 된 일이다. 교주라고 해야 신도는 두 명뿐이었다. 아까 말한 '기숙사의 몇몇 술꾼들'이 바로 그들이다. 반에서 바닥을 기는 성적, 반골 기질, 그리고 술을 좋아한다는 것이 우리의 공통점이었다.
  우리가 만든 종교의 이름은 '물교'였다. 물교를 불교에 버금가는 거대 종교로 키우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지만 교리는 단순했다. 수내천(水乃天), '물이 곧 하늘이다'가 그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수요일마다 술을 함께 마신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술은 곧 물이며, 하필이면 수(水)요일 아닌가. 여기 담긴 신의 계시를 깨닫고 우리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술은 곧 물이요, 물은 곧 하늘이니 술은 하늘의 현신(現身)에 다름 아니며, 술을 마신다는 것은 하늘을 우리 몸 안으로 모시는 경건한 접신(接神) 행위인 것이다. 그래서 수요일은 우리의 주일(酒日)이자 주일(主日)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교주가 된 것은 하늘을 몸 안에 모시는 빈도(頻度)와 그 양이 그들을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수요일 말고 우리가 우리의 신(神)을 모시는 날은 비 오는 날이었다. 비 내리는 밤이면 우리는 어김없이 술병을 들고 기숙사 옆에 있는 숲 속으로 들어가 둘러앉았다. 하늘에선 하늘이 빗방울이 되어 떨어져 우리 이마를 적시고, 우리는 하늘의 또 다른 모습인 술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완전무결한 신아일여(神我一如), 신과 나, 나와 신이 하나가 된 경지였다. 물교도로서 우리의 꿈은 신의 품에 안겨 신과 하나가 되어 죽는 것, 바로 익사(溺死)였다.         
  물교의 헌신적인 신도였던 그때의 친구들, 철팔이와 형팔이. 물교의 영향이었을까. 철팔이는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고, 형팔이는 어느 신흥 교단의 포교사로 일하고 있다. 물론 신도를 잃고 교주 노릇을 그만두었지만 전직 교주로서 나는 아직도 주님을 모시고 산다. 오, 주(酒)여!
 
  8. 기숙사에는 한 학기 이상 있을 수가 없었으므로 2학기가 되자 나는 새로운 선택을 해야 했다. 친소파와 국내파를 두루 거쳤으므로 이번에는 연안파의 적정(敵情)이 궁금해졌다. 나는 나의 신도들, 철팔이 형팔이와 함께 연안파로 당적을 바꿨다. 학교 뒷문으로 나가서 이삼 분쯤 걸어가면 되는 거리에 있는 연립주택단지의 집들은 모두 같은 구조로 돼 있었다. 한 개 동(棟)에는 1, 2층 두 집씩 전부 네 집이 있고, 각각의 집은 방 두 개, 부엌 하나로 이뤄져 있는 전형적인 서민 주택단지였다. 보통 한 개 동에 두세 집은 부업으로 하숙을 치고 있었는데, 그러자면 많든 적든 온 식구가 방 하나에 복닥거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이 하숙촌에는 독특한 불문율이 하나 있었다. 한 달에 한번 꼴로 하숙생들에게 술상을 차려 줘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여러 집이 계 형식으로 모여 하숙생 술잔치를 돌아가면서 한꺼번에 치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하숙생들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베푸는 행사였다. 자식뻘의 까까머리들을 위해 술상을 차려야 했던 하숙집 주인아주머니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지금에야 돌이켜보게 되지만, 그때 우리에게는 마냥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9. 그렇게 연안파로서 희희낙락하는 사이 어느새 10월이 되었다. 예비고사가 코앞에 다가와 있었지만 룸메이트이자 물교도인 우리 셋의 성적은 늘 낮은 곳으로 몸을 낮추는 물을 닮아 있었다. 속으로는 저마다 애가 타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종교인답게 세속의 일에서 초탈한 자세를 견지했다. 물론 우리는 수내천이라는 교리에 받들어 주님을 모시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다.                   
  10월의 첫 주 어느 날, 우리는 아침을 먹은 뒤 학교에 가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인아주머니가 켜 놓은 라디오에서 우연히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인천 지방에는 올해의 첫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갑자기 철팔이와 형팔이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내 눈도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이 있다. 그때 우리가 딱 그랬다. 눈길이 서로 파바박 부딪치고 순식간에 무언의 합의가 이뤄졌다.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우리는 하숙집을 나와    학교 뒷문이 아니라 학교 앞의 큰길을 향해 부지런히 발길을 옮겼다. 그곳에서 인천행 직행 버스를 탈 수 있었던 것이다. 인천에 가면 첫눈뿐 아니라 무언가 신천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10. 나는 초등학교 이후 그때까지 학교를 빼먹어 본 적이 없었다. 11년 개근에 앞으로 두어 달만 더 다니면 12년 개근을 기록하게 될 참이었다. 학교를 땡땡이친다는 것은 나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학교 다니는 것이 즐거워서 그랬다고 할 수 있지만, 3년을 형기(刑期)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고등학생 때도 왜 그렇게 꾸역꾸역 아침이면 무거운 가방을 들고 학교로 향했던 것일까. 혹시 나는 지독한 바보가 아니었을까.
  직행버스를 타고 인천에 도착하니 첫눈은커녕 햇빛이 눈부시기만 했다. 그러나 첫눈은 우리의 눈길이 부딪쳐 불꽃이 튀던 그 순간, 우리의 마음속에 그려졌던 그 이미지로도 이미 충분했다. '인천의 첫눈'이라는 이미지는 엄청난 흡인력을 지닌 그리움이 되어 우리를 끌어당겼고, 그 그리움에 기대어 미지의 길 위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가슴은 이제 막 첫사랑을 고백하고 난 것처럼 쿵쿵 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햇빛보다 더욱 눈부신 것은 우리들의 자유였다.
  그날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기념하기 위해 자유공원에 가서 낮술을 마셨다. 맥아더가 자기도 한 잔 달라고 자꾸 손을 벌렸다.

  <아바와 코마네치>

  1. 한국의 시인 김춘수(金春洙) 그리고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인데, 두 사람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이름이 한글로 '춘수(한자로는 春洙와 春樹지만)'라는 것, 두 번째는 작품의 바탕에 '슬픔'이 짙게 깔려 있다는 점이다. 돌아가시기 전 김춘수(金春洙) 시인을 댁에서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막 팔순이 된 노시인은 왜 시를 쓰느냐는 내 어리석은 질문에 '슬픔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시를 쓴다'고 대답해 주셨다. 하마터면 불경스럽게도 거기에 화답해 '저도 슬픔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술을 마십니다'라고 말씀드릴 뻔했다. 
  사실이다. 누가 나에게 왜 그렇게 술을 마시면서 한세상 살아왔느냐고 묻는다면 '슬픔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생이 무엇인가를 묻던 고등학교 때의 몇 계절을 나는 종로서적에서 지나 보냈다. 수업이 끝난 뒤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그곳에 가서 선 채로 수백 권의 소설과 그보다 훨씬 많은 시집을 읽으면서 나는 서정주(徐廷柱) 식으로 말해 '인생의 팔할이 슬픔'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박중식(朴重湜) 시인의 시 가운데 '슬픈 날은 술퍼, 술푼 날은 슬퍼'라는 절창(絶唱)이 있다. 물론 그런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시절 나를 술 마시게 한 것은 정체를 모를 슬픔이었다. 소주잔을 비우고 나면 잔의 안벽을 따라 소주가 끈끈하게 흘러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물의 흐름과는 아주 다른 그것을 나는 술이 가진 '슬픔의 농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술은 슬픔이고, 그래서 술을 마시는 일은 세상의 슬픔을 마시는 일이며, 세상의 슬픔과 살을 맞대어 하나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열아홉 살이었다.

  2. 이 글은 '취해서 살아온 날들의 기록'이지만 어떻게 취해서 살아온 이야기만 쓸 수 있겠는가. 오늘은 내가 술꾼이 된 이후로 가장 오래 술을 마시지 않고 지냈던 한 시절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그 '한 시절'이란 <사랑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는 글에 썼던 대로 그녀와 마지막 이별의 의식을 치른 첫눈 내리던 날(철팔이, 형팔이와 함께 인천으로 '땡땡이'를 감행한 날 내린, 또는 내렸다고 들었던 첫눈은 전국으로 볼 때의 첫눈이었고, 내 작은 사랑의 끝 페이지를 장식한 첫눈은 서울 지방의 첫눈이었다)부터 예비고사를 볼 때까지 약 한 달쯤의 시기를 가리킨다. 전에 얘기한 것처럼 나는 갑자기 대학에 가고 싶어졌고, 잠과 술의 나날에서 벗어나 딱 한 달만 공부를 해 보자고 결심했던 것이다. 대학에 간들 내 인생이 갑자기 꽃피는 봄날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야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내 청춘을 잠시 예치해 둘 수 있는 은행쯤으로 이용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3. 고등학교 시절 내 별명은 '수면부 장관'이었다. 비슷한 뜻으로 '쫄킹'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수면부는 물론 수면부(睡眠部)이고, '쫄킹'은 '졸다'와 '킹(KING)'이 합쳐진 말이다. 잠과 졸음의 세계에서 왕과 장관을 역임할 만큼 나의 명성은 전설적인 것이었다. 내 이름은 몰라도 '수업시간만 되면 자는 애'라고 설명하면 선생님들도 아이들도 아하,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으니까. 친한 녀석 몇몇은 아예 내 이름을 '잠승팔'로 바꿔 부르기까지 했다. 그렇게 나는 수업시간만 되면 자는 애로 찍혀 있었으므로 선생님들도 당연히 그러려니 인정을 하셨는지 내가 자든 말든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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